삼손의 수수께끼
- KIMMSN
- 2023년 8월 16일
- 14분 분량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사사기14:8)
<#1 삼손의 이야기 요약>
삼손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사기 14장부터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죠
이 사건의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블레셋이란 강한 나라가 이스라엘을 관할하고 있던 때였죠
하나님은 임신을 하지 못하는 삼손의 부모를 찾아와서 삼손이 태어 날 것을 말씀해 주면서 삼 손은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나실인이란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뜻이며
나실인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것을 먹지 않으면 머리카락을 짜르지 않지요
물론 나실인이라고 모두 힘이 쎈것도 아니고 머리카락을 않 잘랐다고 모두가 힘이 쎈건 아니지요
삼손에게만 특별한 은사로 힘을 주신거지요
삼손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삼손의 부모는 동의 했죠
삼손이 자라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즈음에
그는 이스라엘을 관할 하는 적군의 나라인 블레셋의 딤나라는 곳에 갔죠
그곳에서 맘에 드는 여자를 알게 되고 그와 결혼하겠다고 부모님에게 말씀 드렸더니 부모님은 당연히 반대 하셨지요
삼손의 계획은 여자보다는 블레셋을 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사사기 14:4)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삼손이 부모와 함께 그 여자기 있는 도시인 딤나라는 도시의 포도원에 도착 했을때 어린 사자가 삼손을 향해 소리질렀죠
아마 그때 삼손은 홀로 있었나 봅니다
삼손은 그 사자의 입을 찟어 죽였고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았지요
얼마후 삼손은 자신이 죽였던 사자의 시체에 벌들이 꿀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가져다가 부모에게 드렸지만 그 꿀이 사자의 시체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말을 하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나실인은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면 안되기 때문이지요
삼손은 딤나에서 잔치를 열었지요 아마 결혼을 하기 위한 잔치였나 봅니다
그 잔치 중에 삼손은 그들에게 아무도 풀지 못 할 수수께끼를 내었지요
아마도 삼손이 그들을 덫에 걸려는 작전이었던 같습니다
그 수수께끼는 삼손 혼자 만이 아는 것으로 자신이 사자를 죽이고 거기서 꿀을 얻은 사건이지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불레셋 친구들은 삼손의 여자를 협박했고 삼손의 여자는 삼손을 괴롭혀서 그 해답을 알아 냄으로 삼손이 수수께끼에 졌지요
그 댓가로 삼손은 베옷 30과 겉옷 30벌을 벌칙으로 내야 했고요
화가 난 삼손은 아스글롯이란 곳으로 가서 거기서 30명을 쳐서 죽이고 그들의 옷으로 벌칙금을 주고 이스라엘에 있는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가버렸지요
그러자 삼손의 장인이 자기 딸을 다른 블레셋 사람에게 주었지요
이 사실을 모르는 삼손이 얼마후 염소새끼 하나를 데리고 아내의 집으로 갔다가 장인이 자기의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고 말했죠
아내를 잃은 삼손은 화가 나서 여우 300마리를 잡아 쌍쌍이 꼬리에 횟불을 붙혀 묶고 여우들을 놔 주었더니 여우가 온 논과 밭을 돌아다며 불 바다를 만들었지요
이 일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불 태워 죽었지요
이 소식을 들은 삼손은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쳐 죽었지요
그 후 삼손은 가사라는 곳에서 여자 기생을 만나게 되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때에도 삼손을 죽이려 했지만 삼손은 밤 중에 그 성의 문과 문설주를 빼어 들고 산으로 올라가 버렸지요
그 후 삼손은 세번째 여자인 들릴라에게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 블레셋 사람들은 그 여자에게 삼손의 힘의 비밀을 빼 오도록 시켰지요
삼손은 들릴라의 집요함에 비밀을 말해 주었고 들릴라는 삼손의 머리털 7 가닥을 밀었고 삼손은 힘없이 군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지요
삼손을 붙잡은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머리털까지 삭발을 해 버렸지요
졸지에 삼손은 감옥에서 멧돌을 돌리며 동물원 원숭이처럼 놀림감이 되어 버렸지요
얼마 후 삼손의 머리털은 다시 자라기 시작 했고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의 신전에서 승리를 축하하며 삼손을 불러 조롱하며 삼손에게 재주를 부리게 했지요
두 손이 신전에 묶여 있는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짓었지요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16:28)
그리고 삼손은 두 손으로 두 기둥을 힘껏 밀었죠
신전은 무너졌고 삼손을 포함한 그 곳에 모인 삼천명도 함께 죽었지요
삼손의 이야기는 매우 간단하죠
나실인으로 태어나서 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야할 사람이 적군의 여자 3명을 사귀다가 마지막 여자의 배신으로 힘과 두 눈을 잃고 결국 적군과 함께 생을 마감하지요
천하장사 삼손의 이 허무한 삶을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뭘까요?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면
여자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의 이야기라는 결론이 되겠지요
그러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려는 뜻은 예수님을 증거하는것 (요한복음 5:39)이기에 우리는 삼손의 이야기 속에서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찾아 내어야 하는거죠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주인공이신 에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기에
삼손의 수수께끼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려진 그림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 봅시다
<#2 삼손의 외모>
삼손의 외모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헤라클레스나 스파르타처럼 싸움을 잘하는 근육질의 몸짱일까요 아니면 보통 평범한 남자였을까요?
만일 삼손이 엄청난 근육질의 힘쎈 장사였다면 들릴라가 머리카락 7가닥 밀었다고 힘이 다 빠지지는 않았을것 같죠?
그래도 기본 근육이 있잖아요
이스라엘의 적이었던 블레셋 입장에서 봅시다
삼손이 헤라클레스나 스파르타 같은 무서운 외모를 가졌다면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겠지요
그의 근육을 보면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뻔하니까요
다윗 왕의 심복들도 한 사람이 칼과 창으로 적군 수백명을 전쟁터에서 죽일 수 있는 장사들이었지요
그들의 외모를 짐작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런데 만일 삼손의 외모가 일반 우리와 다를바 없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힘이 나온다면
당연히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겠지요
이스라엘의 적군인 블레셋 사람들도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짐작도 못했으니까요
삼손의 미스테리한 힘이 일반인의 용모에서 나왔는데 들릴라의 유혹에 의해 그 힘을 다 잃어 버렸죠
블레셋 사람들은 힘을 못쓰는 천하장사 삼손을 얼마나 조롱 했을까요?
한 작은 아이의 손에 끌려 나와 재주를 부리는 전설적인 삼손을 구경하기위해 블레셋의 신을 모신 다곤 신전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요
만일 삼손이 헤라클레스나 스파르타 정도의 근육 질이라면 아무리 두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을 잘랐다해도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어린 아이의 손에 삼손을 맡기질 않았겠죠
그러니 삼손의 외모는 근육질의 레슬링 선수 같다기보다 일반 우리와 같은 외모이지요
약한 것을 들어 강하게 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삼손에게 꼭 맞을 겁니다
<#2 머리카락의 미스테리>
상식적으로 머리카락 때문에 사람의 힘이 강해 질 수 있을까요?
사람의 힘이 머리카락에 때문이라면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긴 머리를 가진 여자들이 힘이 강해야 하겠죠?
그러나 일반적으로 머리카락이 긴 여자들이 힘이 약하지요
그러니 사람의 머리카락이 힘의 원천은 아닌것 같습니다
아마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머리카락이 짦을 때에는 힘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 삼손을 어린아이의 손에 맡겨 신전으로 끌려 나오게 했지요
그러나 삼손의 힘은 머리카락의 길이에 달린 것이 아니었지요
삼손의 머리카락의 비밀은 하나님과 삼손 사이의 약속ㅇ리 뿐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삼손은 머리카락이 길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지요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16:28)
다윗의 아들 중에 압살롬이란 사람이 있었지요
그의 머리카락 역시 많고 아름다웠지요
그가 매년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그 무게가 2.28kg이였답니다 (사무엘하14:26)
압살롬의 머리카락이 많아서 그가 노새를 타로 가다가 상수리나무 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려있다가 다윗의 신복인 요압이 그의 심장을 찔러 죽였죠 (삼하18장)
압살롬의 머리카락이 1년에 2.28kg였다면 어릴때부터 자르지 않은 삼손의 머리카락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여하튼 삼손의 머리카락은 길이에 의해 힘이 결정 되는것은 아니었지요
들릴라가 삼손의 머리털 7가닥을 밀자 삼손은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떠난걸 알게 되었죠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16:20)”
샤워할때 가끔 머리카락이 7개는 더 빠지지 않나요?
삼손도 그 긴 버리카락을 빨면 몇 개는 빠지지 않을까요?
아마 그렇게 빠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것 같아요
그러나 들릴라에의해 7가닥을 밀었을때에는 이야기는 완전히 달랐죠
그것은 고의적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는 것이었으니까요
삼손의 머리카락은 하나님께서 삼손과 함께 있다는 하나의 약속이며 표시이니까요
삼손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인해 자신이 하나님과 약속한 나실인으로써의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목적을 기억하는 거죠
마치 우리가 무지개를 보면 노아의 홍수 사건과 무지개의 언약을 기억하듯이 말입니다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는 머리카락으로 인해 삼손은 하나님의 언약인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다시 기억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삼손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근거로 그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나실인으로써의 임무를 해내기로 결심한 거지요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의 드라마”에서 죽음으로 자신의 역할을 마쳐야하는 배우임을 알았을까요?
#3 청지기 삼손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두 눈이 뽑히고 머리를 삭발 당할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두 눈을 손으로 감싸면서 어떤 후회를 했을까요?
사랑했던 들릴라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팔아 넘긴 사랑의 배신감에 울부짖었을까요?
혹은 그녀를 용서 했을까요?
아마 이스라엘을 구원해야하는 나실인인 자신의 철없음을 한탄했을것 같습니다
블레셋 군인들이 삼손을 잡아서 두 눈을 뽑을때
병원 중환자실 침대 위에 눕혀서 소독하고 마취 시킨 후 눈 수술을 해 주었을까요?
아마도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부지갱이 같은 쇠를 불에 달구어 두 눈을 불로 지져버렸을것 같아요
물론 소독이나 마취 주사도 없고 입원도 시켜주지 않았겠죠
진통제나 항생제도 없었던 그 시절에 지옥 같이 아픈 두 눈의 고통이 오래 동안 지속 되었을텐데 그것을 견디며 삼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픈 상처의 고통이야 서서히 멀어져 가는 기차 소리처럼 사라지겠지만
눈 앞의 캄캄한 암흑은 삼손에게 더 심한 마음의 고통을 주지 않았을까요?
아마 지난 날의 모든 일들이 한편의 영화처럼 허공을 비취며 스쳐 갔겠죠
사랑하는 들릴라가 머리카락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밤마다 졸라 데는것 때문에 번뇌하여 죽을 지경(삿16:16) 이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감정이었는지 이제야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속은 자신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
두 눈을 크게 뜨고 느꼈던 들릴라를 향했던 밝고 아름다운 감정이 얼마나 암흑이며 공허었는지 두 눈이 뽑히고 나서야 암흑 속에서야 비로소 밝히 보게 되었을거예요
두 눈을 떳을 땐 보이지 않던 것이 두 눈을 잃고 나서야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는 것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러셨잖아요 너희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라구요..
두 손에 힘이 있고 두 눈이 볼 수 있었을 때에는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였는데
이제 손에 힘을 잃고 두 눈이 뽑힌 지금에서야 볼 수 있고 느낄수 있게 되었지요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만 특별히 주신 힘의 이유를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겠죠?
삼손은 태어 날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 났기에 모든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것 같아요
삼손이 블레셋 여자에게 마음이 끌려 그 여자와 결혼하려 블레셋으로 갈 때만해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목적으로 작전상 블레셋으로 가는거였지만 막상 여자를 보니 나실인으로써의 미션은 물 건너 갔고 여자에게 모든 마음을 다 빼았겨 버렸지요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14:4)
딤나에 사는 여자와의 결혼은 물 건너 가버렸지만 블레섹 사람 1030명이 죽었지요
(나귀뼈로 1000명, 수수께기 벌칙으로 옷이 필요해서 30명)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죽인 동기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적군의 여자와 결혼이 망쳤다는 이유 때문이죠
삼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힘의 은사를 여자 3명을 위해 다 써버렸죠
그러나 이것마져 이미 계획 된 하나님의 “언약의 드라마” 의 각본이었지요
이러한 삼손의 일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힘도 잃고 두 눈까지 잃어버린 삼손을 통해 언약의 주인공인 오실 예수님의 언약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삼손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머리털을 다시 자라게 하셨고 삼손은 자라나는 자신의 머리털로 인해 자신이 이스라엫을 구원하는 나실인임을 다시 기억하게 만드셨지요
머리카락은 자연적으로 자라납니다
무지개도 자연 법칙이죠
무지개는 노아 홍수때문에 생긴것은 아니잖아요
무지개는 햇빛과 물이 있으면 어디든 생겨 나지요
그런 무지개에 하나님께서 노아의 언약을 담아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주셨듯이
누구나 다시 자라나는 머리카락이지만 삼손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와 닿게 되었지요
하나님과의 약속이니까요
그 약속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며 일어나는 현상은
마음 속의 기적이랄까? 인지(cognitive)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삼손에게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난다는 사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생각나게하는 중요한 것이었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다시 수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삼손은 자신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 긴 머리카락인 줄 만 알고 자신의 뒤에 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 버렸던 거죠
자연적으로 다시 자라나는 머리카락이 삼손에게는 하나님과의 약속, 언약을 상기시켜 주시는 신호탄이었다니 참 놀랍죠
드디어 두 눈을 잃고서야 밝히 보게 된 것은 자신이 나실인임과 그가 할 일이 이스라엘을 구하는 하나님과의 약속과 사명인 거죠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의 집의 사환이며 종이며 섬기는 청지기임을 잊어 버렸던 거죠
어떤 이는 주인의 상을 준비하는 세프로 섬기며
다른 어떤이는 주인의 제정을 담당하며 섬기지만
삼손은 힘으로 주인을 섬기는 청지기임을 잠시 잊었던 거죠
마치 영화 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잊어 버리 셈이죠
청지기로써의 삼손은 힘도 잃고 두 눈까지 뽑혀 모든걸 잃도 나서야 자신에게 먙겨진 배역, 청지기의 사명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하게 되었지요
마침내 삼손이 나실인으로써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그는 자신이 맡겨진 배역과 그 임무를 끝 낼 각오를 하게됩니다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했던 용서의 기도는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16:28)이었지요
그는 그 마지막 기도와 함께 삼천명의 적들과 함께 죽었지요
삼손은 힘을 가지고 두 눈을 뜨고 건강한 상태에서 감당한 사명보다 힘을 잃고 두 눈이 뽑혀 세상 말로 완전히 파산한 상태에서 감당한 사명이 훨씬 더 컸지요
삼손이 믿음의 조상 반열에 들어 간 이유는
죽으면서까지 더 많은 적군을 죽인것이 이유가 아니지요
그는 자신의 민족에게 버림받고 하나님께 버림 받은 절망적이며 고통스런 현실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나실인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다시 기억하며 죽음으로 자신이 맡은 배역을 감당하여 언약의 주인공의 죽음의 예쵸가 됨으로 그는 믿음의 사람이 된 거죠
누구에게나 무지개는 뜨고 머리카락은 다시 자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자연 현상이지요
그 자연 현상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함으로 자신을 현제 위치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고 자신의 위치를 다시 보게 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며 복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4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
구약에 나오는 모든 절기나 제도, 그리고 많은 특정한 날들이 모두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설명하기위해 만들어 진것같이 나실인이란 제도 역시 예수님을 설명하기위해 만들어진 거죠
삼손이 나실인으로 태어난 것도 역시 언약의 주인공이신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죠
나실인은 구별된 사람이며 하나님께 헌신되어 바쳐진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소유이며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지요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의 드라마’ 속에 나오는 배우이지 그 드라마를 보는 관중 즉,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언약의 드라마’를 위해 그 드라마 안에서 태어나서 그 드라마 안에서 죽는 배역을 맡은 사람이지요
쉽게 표현하면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이란 뜻이죠
이 세상 사람은 영화를 보는 관중이고 우리들은 영화 속의 배우들이죠
영화 속에 있는 사람과 이 세상에 사는 사람과 삶의 기준과 가치가 다르잖아요
성경에 나오는 나실인은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드라마 속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인 거죠
나실인은 드라마 속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포도주나 술을 먹지 않지요
누가복음 22:18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나실인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나신 나실인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 언약의 일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의 결국은 죽음이기 때문에 율법의 결국은 죽음이죠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심판 아래 있기 때문에 저주 아래 있다고 하잖아요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아닌가요?
하나님의 그 거룩한 말씀 아래에서는 감추어진 사람의 모든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거지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니까
율법, 말씀이 인격화가 되어서 예수님이 되시는 거죠
따라서 예수님이 죄를 깨닫게 하고 심판주가 되시는 거죠
그런데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지만 그것으로 정죄하거니 십판을 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서 드러난 모든 죄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대신 죄값으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고 대신 속되를 하십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셨다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4:12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말과 같이 않고 살아있는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시잖아요
예수님은 나실인으로써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언약의 임무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언약을 성취하신 거죠
삼손이 나실인으로 태어난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언약의 주인공을 설명하기 위해서 삼손 역시 죽음으로 나실인의 미션을 완성하는 배역을 맡은거죠
물론 삼손은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나실인의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고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았지요
그러나 나실인으로써 죽음으로 미션이 완성되는 그 배역은 멋지게 잘 해낸 거죠
삼손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언약의 드라마’를 준비 하신 그 드라마의 주인공 배역을 맡은거죠
물론 드릴라는 여배우로 등장했구요
삼손이 특별한 힘을 받은 목적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대 그는 그 힘으로 적군의 여자들과 함께 다 써 버렸고 결국에는 그 특별한 힘까지 빼앗기고 두 눈까지 뽑혀 절망 속으로 던져졌지요
그러나 삼손의 인생의 가장 멋진 하이라이트는 아직 남아 있었지요
삼손이 나실인의 기능을 죽음으로 완성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하는 장면이죠
그렇게 함으로 삼손의 죽음은 언약의 주인공이 오셔서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나실인의 기능을 완성하시 ‘언약의 드라마’를 완성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삼손의 죽음의 의미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거죠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나실인의 의무를 다 했다는 뜻으로 말이죠
#5 삼손의 수수께끼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삼손의 수수께끼를 하나님의 언약에 촛점을 맞추면 그 의미가 너무 쉽죠
강한자와 단 꿀의 이야기까요
심판주이신 강한 예수님과 꿀과 송이꿀처럼 단 그의 말씀이 답이죠
만유의 왕이신 가장 강한자이신 언약의 주인공과 그의 달고 오묘한 말씀이니까요
성경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요한복음5:39절에서 말씀하잖아요
물론 삼손의 수수께끼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거지요
삼손이 생각했던 수수께끼의 답은 자신이 사자를 죽였고 그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얻었던 내용이지요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협박해서 얻어낸 답 역시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라는 사자와 꿀의 이야기 인거죠
삼손이 이 수수께끼를 낸 이유는 세상 아무도 그 문제를 풀지 못하는 걸 알기 때문이죠
그들이 수수께끼의 답을 맞춘거죠
그러면 이 수수께끼를 ‘언약의 드라마’ 안에서 쓰신 드라마 작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맞는 답일까요?
아니지요, 틀린 답이지요
왜냐하면 수수께끼의 비밀은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까요
요한복음 5:39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에수님을 설명하고 증거하기 위한 목적이란 것이 정해 졌으니
이 수수께끼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 내어야 정답이 되잖아요
블레셋 사람들이 맞춘 사자와 꿀이라는 답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맞는 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언약의 드라마’ 안에 사는 우리들에게는틀린 답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 답은 틀린거죠
이것은 마치 무지개가 왜 하늘에 떠있는가의 답은 빛의 굴절현상이죠
학교 과학 시간에는 맞는 답이지만
노아 홍수 사건을 통해 무지개에 담아 놓으신 하나님의 ‘언약의 드라마’ 안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틀린 답이죠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이 빠졌으니까요
삼손도 블레셋 사람들도 그 수수께끼 안에서의 언약에 대한 비밀은 아무도 깨닫지 못했지만 신약에 사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봄으로 쉽게 답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언약을 완성하신 후에는 삼손도 놀랄겁니다
자신만이 아는 경험에서 나온 수수께끼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말이죠
어쩌면 우리들이 살아 왔던 험한 인생을 돌아보면 삼손처럼 놀랄만한 것이 아주아주 많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삼손처럼 나도 모르게 한 말과 행동과 마음의 묵상들이 복음을 증거하는데 쓰이고 있었을거니까요
내 속에 내가 사는게 아니라 주님이 사시니까 당연한거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처럼 언약에 대해서 밝히 모르던 구약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 원핟다구요…
#6수수께끼와 예수님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 2장의 말씀대로
십자가로 인해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가 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가 되십니다
라이언 킹이란 어린이 만화 영화가 있었지요
정글에서 사자가 왕으로 가장 강한 자로 표현 되지요
만유의 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예수님보다 강한자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강하심을 라이언 킹 영화에 비유한다면
사자가 왕이듯이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신 거죠
그 강한 사자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 나왔다는 뜻은
세상을 심판할 심판자이신 예수님에게서 먹을 것이 나온다는 뜻이 되겠지요
요한복음 6:51을 보시면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그 떡을 먹는 자가 영생을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다시말하면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먹으면 영생하는 거지요
강하신 예수님이 산 떡, 생명의 떡, 생명나무의 실과인 거죠
아마 삼손도 자신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 강한 자에게서 꿀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이해 할까요?
문맥상으로 보면 사자에서 단 꿀이 나왔으니 예수님 안에서 단 꿀이 나와야 하지요?
만유의 주이시며 강한 자이신 예수님에게서 꿀과 같이 단 것이 나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시편 19편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 계명, 규례라고 표현하면서 금보다 더 귀하고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말씀하십니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편 19:10)
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달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만유의 왕이며 만유의 주이시며 그가 바로 생명의 떡, 생명의 열매이면서 금보다 귀하고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단 것이 그에게서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삼손의 수수께끼를 통해서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정확히 설명하잖아요
삼손은 자신이 내는 수수께끼가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을것 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꺼예요
삼손이 힘을 잃고 두 눈이 뽑히고 머리가 밀려 감옥에 있을때 그는 나실인으로써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미션을 다시 기억하게 된거죠
그 의미는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된 오실 언약의 주인공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나실인으로써의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거지요
삼손은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자신이 나실인 됨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삶이 희생 제물이 됨을 기뻐하게 된 거죠
하나님께서는 삼손이 희생 제물이 됨으로 장차 오실 언약의 주인공의 희생 제물에 대한 모형이 되도록 “언약의 드라마”를 기획하셨던 거니까요
삼손은 물론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의 드라마’에서 각기 작은 배역을 맡아 복음이 땅 끝까지 퍼지는 곳마다 보냄을 받아 그 곳, 그 자리에서 맡은 배역을 잘 감당하며 살잖아요
#7 우리도 나실인
구약에 나실인 제도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과 언약의 주인공이신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그 은혜 중의 일부를 알려주시기 위해 예표로 주신 제도라고 우리는 이미 알잖아요
물론 나실인이라고 모두 힘이 쎄거나 혹은 죽음으로 나실인의 임무를 마치는 모습을 보여 주는건 아니죠
삼손을 죽음으로 완성되는 언약의 주인공의 역할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죠
삼손이 받은 특별한 힘의 은사는 죽음으로 임무를 완수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받은거지요
물론 그 힘 때문에 죽음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지름 길을 가게 된거구요
삼손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의 주인공의 죽음으로 성취되는 나실인의 기능을 보여주는 십자가 죽음의 예표가 되었지요
드라마의 주인공답게 죽은거죠
삼손의 역할은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감독의 완벽한 기획을 보여 주었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언약을 성취하는 예표적인 배역을 삼손은 멋지게 한거죠
삼손 뿐아니라 사무엘, 세례요한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구별되어 태어난 나실인입니다
성령으로 구별되어 태어 나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삼손은 특별한 힘을 은사로 받았지만 우리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른 모습으로 주님이 주신 삶 속에 필요한 각종 다른 은사를 각각 받았지요
손재주 좋은 은사, 말 잘하는 은사, 음악 재능, 공부 잘하는 재능, 완벽한 주부의 재능, 사업수단, 발명가, 뭐든지 잘먹는 은사, 묵묵히 일하는 은사 등등 얼마나 다양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실인의 기능을 성취하신 것을 증거하기위해
그 많은 사람들의 은사가 모여 한 몸을 이루는 그 몸이 예수님이시죠
우리 몸에 새끼 발톱도 없어서는 안되듯이 말입니다
삼손은 죽음으로 증거했고 수많은 순교자들도 죽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죽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해야 하나요?
우리도 순교해야 하나요?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주님에게 속한 사람은 모두 순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두 이미 순교했습니다
갈라디아2:20을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역시 주님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닌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지요
주님께서 나실인으로 사명을 마치실때 우리 역시 그 사명을 주님 안에서 함께 마쳤조
삼손처럼 개인적으로 미션을 성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내”가 아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언약이 성취에 동참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로는 “나”라는 존제는 없고 “우리”라는 성도가 존제하죠
예수님의 신부로써의 성도, 교회가 한 몸인 거죠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셔서 이 세상에 안계시지만
우리는 육신이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잖아요
그 뜻은 우리는 예수님처럼 더 이상 역사적이며 물리적인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에 속한 사람이 아니지만 아직 썩어지지 않은 육신은 남아 있는 거죠
갈라디아서 말씀처럼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시기 때문에
삼손처럼 죽어야 할 필요가 없어요
삼손은 죽음으로 나실인의 사명을 이루었지만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나실인의 사명을 이미 성취 하였죠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나실인의 사명이 성취한 상태로 구별되이 태어난 거죠
비유하지면 마치 달리기 선수가 금메달을 받아 놓고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과 같지요
이것을 구원에 적용한면
이미 주님 안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이 세상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모습인 거죠
두려움과 떨림으로 율법의 행위를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것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과 또 그 구원을 위해 우리 삶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님과 그 나타나는 열매의 모습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보게 된다는 거죠
내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목격하며 그 증인이 되는 거죠
구원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니까요
내 안에는 구원을 이룰 내가 없고 구원의 주인이신 주님만 계시니까요
내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님이 주체자로써 주님께서 하시는 일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를 우리의 열매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잖아요
이것이 삼손과 우리의 다른 점인 거죠
언약이 성취 되기 전과 후의 다른 점이기 때문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나요?
주체자로써는 아무 할 일이 없지요
만일 내가 무슨 일을 한다면 그것은 내 속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일이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마치 사도행전의 사도들처럼 성령님이 주체가 되어 사도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일을 하시는거 처럼 말이죠
주님께서 나를 도구로 사용하여 일을 하시는거죠
그것을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12:1)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십자가에 드림같이 우리도 주님 안에서 산 제물이 되어 드려졌음으로 주님 안에서의 삶이 바로 영적 예배라는 것이지요
삼손은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려 자기도 죽고 적군들도 죽임으로 자신이 제물이 되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을 삼손처럼 그렇게 죽일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요
나실인인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에서 이미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림이 되었지요
그로 인해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고요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눈 앞에 밝히 보는 삶을 살며 그 의미를 항상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거죠
그것이 영적 예배의 삶인 거죠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며 죽으시는 예수님 안에 우리가 함께 포함 되어 있어 주님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 함께 있음을 생각할때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이 아닐까요?
주님과 함께 교감하며 동감하는 그 두려움과 떨림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의 삶인 거죠
따라서 그런 한마음 한뜻이 된 성도의 모임은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서의 경배와 찬양의 삶이 되겠지요
언약이 성취 되지 않은 구약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그런 언약 성취 후의 특권을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거죠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영적 예배의 기초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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